시간을 멈추는 방법에 관해 고민한 적이 있다. 답은 아직 못 찾았다. 시간은 잡을 수도, 밀고 당길 수도 없는 불가항력의 힘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매 순간 최선을 다해 보내야 한다. 스위스의 시계 브랜드 예거 르쿨트르는 시간을 붙잡는 대신, 정확히 측정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처음 시계를 만든 1833년부터 지금까지, 180여 년 동안. 일 초에 한 칸씩 시간이 쌓이듯 퇴적된 그들의 기술에는 어떤 노력이 있었을까. 그리고 그 노력을 가능케 한 철학은 무엇이었을까. 매일매일 느리지만 꾸준히 앞으로 나아가는 스위스의 시계 장인 브랜드, 예거 르쿨트르를 소개한다.
- 글
- 박찬용
- 사진
- 예거 르쿨트르
지금 백화점의 고가 시계는 사실 모두 고급 세공품이라 좋은 시계를 하나만 꼽을 순 없다. 다만 ‘스위스 시계의 정통성은 무엇인가’라고 질문한다면 대답이 조금 달라진다. 정통 스위스 시계 브랜드 역시 적지 않으나, 이 질문에 가장 가까운 시계는 예거 르쿨트르(Jaeger-LeCoultre)다.


스위스 시계의 정통성은 역사와 창업주라는 필터로 걸러볼 수 있다. 스위스가 시계로 유명해진 배경은 17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때의 시계공들은 유럽의 각 도시에서 교회의 괘종시계를 제작하거나 수리하는 소수 전문직이었고, 종교는 칼뱅파(위그노)였다. 이들은 루이 14세의 종교 박해를 피해 스위스의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 시계공이 되었다. 스위스에서 차로 한 시간쯤 떨어진 발레 드 주(Vallée de Joux)나 라 쇼드 퐁(La Chaux-de-Fonds) 지역에 시계 회사가 많은 역사적 배경이다. 예거 르쿨트르의 초기 창립자인 르쿨트르 가문도 이 시기에 스위스로 건너온 이민자의 후손이다.
앞선 기술력으로 개척한 성공 시대


피에르 르쿨트르의 후손 앙트완 르쿨트르가 1833년 시계 공방을 열고 1844년 중요한 기계를 개발한다. 마이크로미터 단위를 잴 수 있는 측정기기인 밀리오노미터(Millionomètre)다. 시계가 정확해지려면 부품의 치수가 맞아야 하고, 부품의 치수를 제대로 확인하려면 측정기기가 정확해야 한다. 르쿨트르는 이때부터 앞서 있었다. 앙트완과 그의 아들 에밀 르쿨트르는 발레 드 주 지역에 ‘르쿨트르&씨(LeCoultre&Cie)’를 만들어 500여명을 고용할 정도의 큰 회사로 성장시킨다.
르쿨트르&씨가 예거 르쿨트르가 되었다는 건 파트너가 생겼다는 의미다. 예거의 풀 네임은 에드몽 예거, 파리 기반의 시계 제작자다. 에드몽 예거는 프랑스 해군을 위해 일하던 중 얇은 무브먼트를 만들기 위해 르쿨트르의 도움을 구한다. 둘의 협력 관계가 성공적이라 1937년부터 예거 르쿨트르라는 이름을 쓰게 된다.
이렇듯 예거 르쿨트르의 큰 특징은 무브먼트 기술력이다. 지금의 시계 회사는 무브먼트부터 케이스에 이르는 시계의 전 영역을 제작하지만 예전의 시계 회사는 자동차 부품 전문 제조사들처럼 특기 영역이 정해져 있었다. 예거 르쿨트르의 전문 영역은 시계의 엔진 역할을 하는 무브먼트다.



그래서 예거 르쿨트르는 역사적으로 시계 무브먼트 관련 최초 기록과 특허가 많다. 이들은 200개 이상의 특허를 보유했고 1,000종 이상의 시계 무브먼트를 만든 전력이 있다. 대표적인 특허가 열쇠가 필요 없는 시계 와인딩 시스템이다. 19세기에는 시간을 맞추는 부품과 시계의 태엽을 감아주는 부품이 따로 있었다. 르쿨트르 시절인 1847년 이 두 부품이 통합되며 한층 편리하게 시계를 쓸 수 있게 되었다. 파텍 필립이나 까르띠에, IWC 등도 예거 르쿨트르의 무브먼트를 납품 받아 시계를 제작한 전력이 있다.



예거 르쿨트르는 계속 기술적 과제에 도전했다. 1907년 에는 세계에서 가장 얇은 무브먼트를, 1925년에는 2층 구조로 가공해 한층 작아진 ‘듀오플랜’ 무브먼트를 개발하기에 이른다. 무브먼트뿐 아니라 케이스 개발에도 신경을 써서 1931년 신기한 시계를 출시한다. 시계의 케이스를 돌릴 수 있는 시계다. 당시는 유리가 약해서 시계 유리가 깨지는 일이 잦았고, 그래서 케이스를 돌려 시계 유리를 보호하는 시스템을 만든 것이다.
그때의 전통이 여전히 예거 르쿨트르 대표 모델 리베르소로 이어진다. 오늘날 예거 르쿨트르는 케이스가 돌아간다는 특징에 여러 요소를 덧붙인다. 리베르소는 구조상 최대 4개 면에 시계를 구현할 수 있다. 돌아가는 케이스 아래에 고정된 케이스도 있기 때문에 각 케이스의 앞뒷면을 모두 쓰면 4개의 면에 시계를 표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2021년 발표한 ‘히브리스 메카니카 칼리버 185’는 4개의 면에 모두 각각 다른 시계 장치가 펼쳐진다. 정면 케이스 전면에는 표준 시간과 윤년 달력을 표시한 퍼페추얼 캘린더가 자리한다. 후면엔 매시간마다 숫자가 바뀌며 시간을 알려주는 ‘점핑 아워’와 회전 디스크로 시간을 표시하며, 현 시각을 종소리로 들려주는 ‘미닛 리피터’ 가 자리한다. 후면 케이스 전면에 북반구 달의 움직임과 달의 경로 등을, 후면에 남반구 문페이즈와 밤하늘을 보여주는 스카이차트를 넣었다. 예거 르쿨트르의 기술력과 상징성을 두루 보여주는 야심작이다.



같은 해에 ‘리베르소 트리뷰트 미닛 리피터’도 발매됐다. 핑크 골드 리베르소 케이스에 미닛 리피터 무브먼트인 칼리버 944를 장착했다. 까르띠에 말고 조금 더 고전적인 느낌의 사각 시계를 원한다면 리베르소도 좋은 대안 중 하나다.


한편 리베르소의 뒤편 케이스는 소중한 요소를 새기는 캔버스가 되기도 한다. 실제로 예거 르쿨트르는 인그레이빙 서비스를 시행한 이래 온갖 아이디어를 가진 다양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자식이 어릴 때 그렸던 그림을 새기는 사람도 있고, 최근에는 QR코드를 새긴 경우도 있었다. 인그레이빙 가능 범위가 생각보다 넓으므로 진지하게 원한다면 상담을 받아 보는 것도 좋겠다.
위에서 말한 시계들은 자동차로 치면 F1 시합용 차량 같은 거라 전 세계에 각각 10개만 출시된다. 이런 기계를 우리 같은 보통 사람이 살 필요는 없겠지만, 반대로 본인이 보통 사람이 아니다 싶으면 눈독 들일 만도 하다.




예거 르쿨트르의 자랑은 손목 시계만이 아니다. 대기압에 움직이는 탁상 시계인 ‘애트모스’ 역시 1925년 개발된 이후 예거 르쿨트르만의 아이콘으로 자리 잡았다. 실제로 보면 옛날 유럽 고급품 특유의 기품이 상당하다. 아트모스도 리베르소처럼 개인화 서비스가 가능하다.
INFO
운영
월-목 10:30~20:00, 금-일 10:30~20:30
주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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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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