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해와 상상이 빚어낸뇌신 설화

예부터 인류는 동서양을 가리지 않고 천둥과 번개의 신을 모셨다. 북유럽에 토르가 있다면, 동양에는 우주의 질서를 유지하는 강력한 힘을 가진 ‘뇌신’이 있다. 비, 바람, 천둥, 번개 등 생업과 직접적인 관련을 맺었던 자연 현상은 선조들에겐 매우 중요한 삶의 요소였다. 기상이변이 있을 때마다 하늘을 보며 간절히 빌었던 소원은 여러 신화를 만들어 냈고 그중 하나가 ‘뇌신 설화’다.

 

조선왕조 실록에도 여러 번 등장하는 뇌신 설화에 따르면, 당대 사람들은 벼락이 떨어진 곳에서 발견된 돌도끼를 ‘벼락 도끼’라 부르며 뇌신이 지니고 다니는 물건으로 여겼다. 신의 소지품인 만큼 신묘한 힘이 깃들어 있다고 믿었는데, 특히 ‘치료’의 기능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믿음은 불임치료에 쓰이거나 만병통치약처럼 귀한 약재로 판단되어 갈아 마실 수 있도록 임금에게 진상품으로 올렸을 정도였다.

 

조선시대 사람들이 신의 도끼라 믿었던 ‘벼락 도끼’는 사실, 선사시대의 유물 ‘돌도끼’다. 재료도 도구도 풍부하지 않았던 시절의 작품이라고 생각하지 못할 만큼 정교하고 섬세하게 만들어진 탓에 신이 만든 물건이라는 오해를 단단히 불러일으킨 것이다.

과거부터 현재까지 쓰임이 있는 존재

인센스 홀더 ‘벼락’을 제작한 이정빈 도예가는 대학원 진학과 팬데믹 출현 시기가 겹치면서 수업과 실습은 물론 일상의 모든 것이 멈춰버렸다. 자칫 정체되고 답답할 수 있는 시기에 그동안 해보지 않았던 일을 하자고 다짐한 그는 창작자들이 하나의 주제를 가지고 저마다 다른 제품을 제작하는 텀블벅 프로젝트 ‘CLAP’ 1기에 참여했다.

 

“CLAP 1기 테마가 설화와 신화였어요. 전혀 관심 없던 분야인 만큼 주제가 신선하게 다가왔죠. 도자기로 이 주제를 표현하면 어떻게 나올까? 그 결과가 기대되고 참여 자체로도 충분한 공부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에 지원했습니다.”

 

작품 제작의 모티브가 될 설화를 찾던 그는 ‘가야의 건국 설화’와 ‘삼국지 도원결의’를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증명할 수 없는 픽션이 난무하거나 이미 상품화되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면서 기획을 수정했다. 그러다 2016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진행된 기획 전시를 알게 됐는데, 선사시대 유물을 조선시대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했는지 오랜 시간의 흐름을 되짚어 보며 연결성을 고찰하는 전시였다. 학술적으로 정리된 자료를 살펴보며 억지스러운 점은 없는지, 이미 상품화된 사례는 없는지 충분히 검증한 그는 ‘뇌신 설화’를 CLAP에서 선보일 작품 테마로 선정했다. 무엇보다도 뇌신 설화에 등장하는 ‘돌도끼’가 과거부터 꾸준히 실생활에서 ‘쓰임’을 가졌다는 게 반갑고 흥미로운 지점이었다.

 

“공예는 일상에서 쓰임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어요. 선사시대에는 말 그대로 ‘도끼’로 사용됐고, 조선 시대에는 몸에 지니고 다니는 작은 부적 혹은 만병통치약으로 쓰였다면, 오늘날 우리 곁에 둘 수 있는 작은 오브제로 활용하기에 무엇이 적절할까 고민을 거듭했죠.”

 

수차례 고민 끝에 그는 인센스 홀더를 제작을 결심했다. ‘뇌신’을 주제로 이야기를 풀어가면서 과거 사람들이 그랬듯이 제품을 통해 신과 연결된다는 의미를 전하고 싶었다. 동양 문화권에서 향을 피우는 행위가 신과 통한다고 여기는 것에 착안해 인센스를 떠올렸고, 마침 자루와의 결합을 위해 돌도끼에 파인 가운데 구멍도 인센스 스틱을 꽂기에 제격이었다

“선사시대 돌도끼를 뇌신의 기운을 담은 벼락 도끼로 여기며 생활에서 이롭게 쓰고자 했던 선조들의 마음이 오늘날 우리에게도 전해지길 바랐어요. 조선시대 사람들의 일상에 한 부분을 차지하는 물건으로 사용됐다는 점도 창작자로서 많은 상상력을 불러일으켜 흥미로웠고요.” 
-이정빈 도예가
“선사시대 돌도끼를 뇌신의 기운을 담은 벼락 도끼로 여기며 생활에서 이롭게 쓰고자 했던 선조들의 마음이 오늘날 우리에게도 전해지길 바랐어요. 조선시대 사람들의 일상에 한 부분을 차지하는 물건으로 사용됐다는 점도 창작자로서 많은 상상력을 불러일으켜 흥미로웠고요.” - 이정빈 도예가
본격적인 제작을 위해 국립중앙박물관을 방문하여 그곳에 소장된 선사시대 돌도끼 유물을 토대로 3D 모델링을 진행했다. 기하학적이며 정교한 만듦새를 구현하는 데 집중하는 한편, 무엇보다 돌의 질감을 유약으로 구현하는 과정에 심혈을 기울였다. 돌도끼가 모티브라는 점을 살려 너무 매끄럽지 않으면서 그렇다고 너무 딱딱해 보이지도 않는 적당한 느낌의 감촉과 질감을 표현하는 것이 중요했다. 몇 차례 유약 실험을 통해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은 후에야 ‘아주 먼 옛날 이 땅에 살았던 사람들과 현재의 우리를 이어주는 오브제’, 인센스 홀더 ‘벼락’을 완성했다.

다양한 창작들과의 만남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시간 

한편, 다양한 창작자들이 모인 CLAP 1기는 공예, 프린팅, 입체물 제작 등 총 9팀이 참가했다. 코로나19로 자주 교류할 수 없었지만, 한 달에 한두 번 소수 인원으로 만나 피드백을 주고받으며 각자의 경험과 노하우를 나눴다. 개인적으로 펀딩 진행 경험이 있지만, 기획 프로젝트로서의 펀딩 참여가 처음이었던 이정빈 도예가는 매력적인 이야기를 담은 제품을 만드는 것과 이를 효과적으로 홍보하고 판매하는 것은 또 다른 차원의 일이라는 점을 배웠다고 회상한다.


“제 분야의 일만 하다가 범위를 넓혀 다양한 창작자들을 만나며 좋은 자극을 받았어요. 펀딩을 기획하고 제품을 선보이는 경험을 통해 새롭게 배운 점도 많고요. 무엇보다 제품이 가진 이야기를 대중에게 잘 전달하는 것도 창작자의 몫이라고 느꼈습니다.”


그는 기억에 남는 다른 창작자의 작품으로 ‘유수’ 작가의 내 손안에 새롭게 깃든 신, 프로젝트를 꼽았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세 명의 여신을 젠더리스하게 풀어낸 반지였어요. 아테나의 용기, 데메테르의 끈기, 헤스티아의 중용 등 여신들의 업적과 힘에 초점을 맞춰 성별의 경계가 희미한 자연 이미지로 풀어낸 시도가 인상적이었습니다.”

이정빈 도자기에서 선보일 쓰임과 가치

CLAP 참여 당시나인스톤스 세라믹으로 불렸던 그는 다시 그의 이름 석 자로 돌아와 지금은이정빈 도자기로 활동 중이다. ‘벼락은 텀블벅 프로젝트를 위해 기획한 제품인 만큼 현재는 생산 및 판매를 중단했다. 다소 아쉬움이 남지만일상에 자연스레 어우러지는 미적 사물로서 도자기를 빚으며, 사물 그 자체로 가치 있고 소중하게 빛나는 작품들을 제작하고 있다. 지난 8월 전시에서 선보인큐브 시리즈는 사진을 전공한 그의 과거와 도예가로 활동 중인 그의 현재를 이어주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지금은 저를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해요. 스스로에 대한 탐구와 자아성찰을 거듭하면서 내가 표현하고 싶은 게 무엇인지 개성과 철학을 다지는 시기죠.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그동안 공부한 사진이 떠올라서, 사진의 주요 비율을 모티브로 한큐브 시리즈를 제작했어요. 앞으로 또 무엇을 만들지 모르지만, 끊임없이 성장하면서 계속 작업하고 싶습니다. 그게 제 꿈이에요.

 

 

우주를 쏟아부은 듯한 영롱한 빛깔의큐브 시리즈는 투박하고 거친 매력의 인센스 홀더벼락과는 빛과 결이 달랐다.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지닌 젊은 도예가의 손길을 거쳐 탄생할 작품이 무엇인지 앞으로 누구도 예측할 수 없겠지만, 한 가지는 예상할 수 있었다. ‘이정빈 도자기에서 선보일 작품은 과거와 현재의 흩어진 시간을 촘촘히 이어줄 것임을, 미래의 어느 날에도 빛나는 쓰임을 가진 오브제임을

INFO

이정빈 도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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