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GEEP> 독자분들께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그림 그리고 글도 쓰고 영상도 만드는 크리에이터 이연입니다. 목소리와 그림을 통해 제 이야기와 생각을 전하는 유튜브 채널도 함께 운영하고 있어요.

유튜브는 어떻게 시작하게 되셨나요?

사실 가벼운 마음으로 유튜브를 시작했어요. 유튜브를 즐겨보다 보니 제가 원하는 스타일의 그림 채널이 별로 없더라고요. 평소 일기나 블로그로 꾸준히 그림과 생각을 기록해왔기에 영상도 하나의 기록 수단이라고 생각해서 큰 어려움없이 시작했어요. 당시에는 프리랜서 디자이너라 비교적 시간이 여유로웠던 것도 한 몫 했고요.

2017년도 SNS에 올라온 그림일기에 “나는 종종 내가 잘되어서 강연을 하는 상상을 하는데”라는 문구가 나와요. 유튜브 시작 3년 만에 구독자 68만 명을 기록하고, 강연도 여러 차례 하셨죠. 상상이 현실로 이뤄진 비결은 무엇일까요?

솔직히 운이 아주 좋았던 것 같아요. 채널을 처음 시작했을 때는 말없이 그림만 그리면서 노래가 나오는 영상을 하나 올렸거든요. 그래 놓고 제목은 ‘크로키 그리는 법’이에요, 무려. ‘그리는 법’은 안 알려주고 그냥 저 혼자 그리는 영상인데, 그 말도 안 되는 영상이 초반 조회 수가 1,000회 정도 나왔어요. 저는 유튜브는 사람들이 많이 보는 플랫폼이라서 그런가 보다 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데, 나중에 보니 조회 수 100회를 넘기는 것도 어려운 일이더라고요. 처음부터 운이 좋았던 거죠. 한 달 뒤 ‘겁내지 않고 그림 그리는 법’ 영상이 트위터에서 입소문을 타고 10,000회 넘게 리트윗되고 채널이 급성장했어요. 여기까지는 전부 운이었던 것 같아요.

 

다만 주어진 운을 내 것으로 만들고, 단단하게 굳히는 과정이 더 중요한 것 같아요. 당시에는 회사에 다니고 있었는데, 잠을 줄여가며 꾸준히 영상을 만들었고 콘텐츠에 대해 고민한 시간이 채널 성장에 크게 도움이 됐어요. 운이 좋았던 만큼 운을 지키기 위한 노력을 많이 했어요.

작업하실 때 연필, 펜, 만년필, 물감, 아이패드 등 정말 다양한 도구가 등장해요.

요즘엔 연필을 제일 많이 쓰고 있어요. 전날 저녁에 미리 깎아 둔 뾰족한 새 연필을 아침에 꺼낼 때 기분이 좋아요. 딥펜과 아이패드는 연필처럼 닳고 깎아 쓰는 감각을 느끼기는 어렵거든요. 다양한 도구가 있지만 역시 연필만의 매력이 있는 것 같아요.

그림을 처음 시작하셨던 때를 떠올려 볼까요? 어린시절 이연님은 어떤 꿈을 꾸는 아이였는지 궁금해요.

아주 어렸을 때였어요. 프린트기에 꽂힌 A4용지를 뽑아서 아무렇게나 그림을 그렸죠. 그때도 사람 그리는 걸 제일 좋아했어요. 제 조카도 저처럼 A4용지에 매일 그림을 그리더라고요. 그 모습을 보면 제 어릴 때 생각이 자주 나요. 다만 학창시절에는 장래희망을 적는 칸에 화가나 만화가 대신 피아니스트를 적었어요. 어른이 돼서도 계속 그림을 그릴 거라고 전혀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아요. 뭐가 되었든 어른이 되면 그냥 돈이 참 많았으면 좋겠다, (하하) 솔직히 그런 생각을 했죠. 지금의 저는 상상도 못한 모습이긴 해요.

SNS에 올라오는 그림일기에는 전구 캐릭터가 등장해요. 이 캐릭터는 어떻게 탄생했나요?

대학교 3학년 때 일러스트레이션 수업에서 교수님이 자기만의 캐릭터를 만들어오라고 과제를 주셨어요. 비단 저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을 대체할 수 있는 오브제를 찾고 있었는데 마침 기숙사 침대에 누워서 바라본 천장 전등이 눈에 띄더라고요. 전구가 환하게 빛을 내다가 서서히 필라멘트가 끊기며 수명을 다하는 모습이 사람과 비슷하다고 느꼈어요. 이후 방산시장에서 조명을 사서 연구했고, 졸업 전시 때에도 전구를 메인 주제로 작품을 만들었어요. 그런 과정을 거쳐 자연스럽게 제 캐릭터로 남은 것 같아요.

이연님은 영화, 풍경, 예술가 등 다양한 소재를 다루는데요, 영감이 되었던 인물이나 작품이 있다면 소개 부탁드려요.

스페인 여행을 갔을 때 피게레스에 있는 살바도르 달리 미술관에 다녀온 적이 있어요. 그전까지만 해도 좋아하는 작가가 있냐는 질문에 답하기 어려웠는데 이제는 주저 없이 달리라고 대답해요. 달리의 유명한 그림들 외에도 다양한 습작과 인테리어, 주얼리, 사진, 영상 등만 봐도 영감이 샘솟더라고요. 달리는 누구나 사랑하는 예술가이기에 그를 좋아한다는 게 멋진 대답은 아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달리가 좋아요.

개인 작업을 비롯해 많은 브랜드와 협업하셨는데요, 어떤 작업이 기억에 남나요?

모나미와 함께 한 플러스펜 제작이 가장 기억에 남아요. 제 유튜브 전체 조회 수 그래프를 보더라도 그때 채널 성장 및 유입이 눈에 띄게 높은데요, 케이스 디자인과 구성에 특히 많은 공을 들였던 작업이었죠. 사실 재고가 많이 남을까 봐 걱정했는데 오픈하자마자 1만 명이 몰리면서 바로 품절이 됐어요. 우려했던 일과 정반대의 성과를 이뤄 다행이면서도 동시에 얼떨떨했죠.

작품 혹은 채널을 통해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무엇인가요?

그냥 그때의 제가 하고 싶은 말과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을 기록할 뿐이에요. 타인을 너무 의식하다 보면 느끼하거나 애매한 창작물이 나오더라고요. 그래서 ‘사람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하고 싶다’는 마음보다 ‘내가 이런 말들을 남겨서 미래에 다시 한번 꺼내 보고 싶다’와 같은 마음으로 제작하고 있어요.

브랜드 디자이너로 일하셨다가 크리에이터로 전향하면서 출판, 전시, 강연 등 다양한 작업을 하셨죠. 새로운 분야에 도전하는 이연님의 비법이 있다면요?

저에게 새로운 도전이란 끝없는 젊음이에요. 인생이라는 게 영민한 상태로 깨어 있으면서 젊게 살기 쉽지 않더라고요. 도전은 인간을 깨어 있게 만들고 계속 메시지를 던져주는 것 같아요. 사실, 실제로 뭔가를 시작할 때 ‘도전’이라는 단어는 굳이 생각하지 않아요. 그냥 ‘한다’ 정도로만 생각하고 해보는 거죠. 와중에 망하는 건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처음에 뭔가를 할 때는 대부분 비밀로 해요. 설레발치면 결과가 아쉬울 때 괜히 창피하더라고요. 몰래 새로운 일들을 하다 보면 자유로운 마음을 느낄 수 있어요. 아무래도 제가 대중에게 드러난 사람이 되어서 제가 하던 일만 계속하면 이 안에서는 자유를 찾기 어렵거든요. 계속 나를 자유롭게 해주고, 새롭고 어린 마음을 갖게 해줄 것들을 찾는 거죠. 배우는 사람이 젊음을 유지한다고 생각해요.

작년에 출간된 에세이 <겁내지 않고 그림 그리는 법>을 보니 ‘그리지 않는 사람’을 ‘그리고 싶게 만드는’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연님은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으셨나요?

역설적으로 저도 여전히 겁낸다는 이야기를 담고 싶었어요. 사람들은 제가 아무렇지 않게 그림을 그리는 줄 알더라고요. 실제로 그런 것 같기도 하지만. (하하) 저는 그림을 그리면서 겁을 낸 시간이 너무 길었어요. 지금은 예전만큼 애착을 갖지 않고 다소 거리를 둬서 겁이 덜 날 뿐, 좋은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욕심이 솟으면 여전히 겁이 나요. 근데 그 감정이 비겁한 것도 아니고, 약한 것도 아니라는 이야기를 전하고 싶었어요. 벌벌 떨릴 만큼 그림이 소중하고 좋다는 증거니까요.

시작하는 두려움은 비단 ‘그리는 일’에만 국한되어 있는 것 같지 않아요. 예를 들면 글쓰기에도 적용할 수 있고요. 시작과 과정이 두려운 사람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요?

‘걷고 있는 그 흙길이 모든 예술가가 똑같이 걸어온 길임을 기억하라.’ 


제가 책에도 적었던 문장인데요. 창작하는 여정을 보면 누추한 일들이 많은 것 같아요. 외면받거나, 피드백이라는 명목하에 거침없이 상처받기도 하죠. 또 스스로 어설픈 모습을 못 견디는 경우도 많아요. 근데 생각해 보니 예술가라면 모두 그런 시절을 겪었더라고요. 아무리 구독자가 많은 채널이라고 해도 모두 0명부터 똑같이 시작하잖아요. 내가 부족한 것은 여정의 초입이라서 그런 거로 생각하면 꽤 괜찮은 위로가 되더라고요. 실제로도 그래요. 미대를 졸업하고 8년이 지났는데 여전히 그림을 그리는 동기들은 소수예요. 어떤 분야든 처음 발을 떼기는 쉽지 않아요. 일찍 포기하는 사람의 발은 깨끗하겠지만 멀리 가보기는 어렵겠죠. 오래 하는 사람은 멀리 갈 수 있어요. 내가 가는 길이 막막할 때 누군가 그 길을 똑같이 걸었다고 생각하면 이정표가 보여요. 스페인 여행할 때 한국어를 익숙하게 하며 추로스를 주는 현지인을 보며 그런 것을 떠올렸어요. 한국인 여행자 선배가 많이 왔다 갔구나. 어떤 일이든 비슷한 경험을 한 선배가 있었기에 조금은 편하게 나아갈 수 있는 것 아닐까요.

올해 계획이나 목표가 있다면 말씀해 주세요.

저를 조금 덜 드러내고, 단단하게 만들고 싶어요. 2021년은 저를 적극적으로 세상에 내보이고 부딪히게 하는 해였어요. 물론 거기서 배운 것도 많지만 피로감도 느꼈어요. 지금은 조금 쉬면서 창작물의 개수 자체를 더 늘리고 싶어요. 책도 부지런히 쓰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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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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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graph  / Lino Ki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