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경기에 남아있는 백제의 흔적

백제 말기를 배경으로 한 사극과 영화의 영향 때문인지 최근 백제를 상징하는 곳이라고 하면 지금의 충청남도 지역을 떠올리는 경우가 많다. 흔히 신라에 대해 이야기할 때 영남 지방과 관련 있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으므로, 막연히 현재의 행정구역에 따라 호남 지방이 백제를 상징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하지만 실제 역사를 살펴보면 이러한 고정관념이 옳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백제의 역사는 약 700년간 이어졌는데, 그 중 500년 가까운 시간 동안 백제의 중심지는 서울과 경기 지역이었다. 그 중에서도 학자들이 가장 주목하는 곳은 서울 송파구의 풍납토성과 몽촌토성 일대다. 두 성 중 어느 성에 백제 임금이 살았는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여러 학설과 다양한 논란이 있지만 두 성 언저리가 백제의 도성이었을 거라는 데는 대부분의 학자들이 동의하고 있다. 두 성에서 그리 멀지 않은 석촌동 고분군에 고대 실력자들이 돌을 쌓아 만든 무덤이 여럿 남아 있다는 점도 이 지역이 약 2천 년 전 백제의 중심지였다는 증거다.

백제의 놀이와 백제의 흥

역사상 가장 중요한 바둑을 두었던 곳

풍납토성

긴 세월 백제의 도성으로 이름을 날린 곳이 훗날 사람들에게서 잊힌 이유는 5세기 고구려군의 침입으로 백제의 도성이 파괴되었기 때문이다. 불행 중 다행으로 그 시절 백제의 도성이 어떻게 사라지게 되었는가에 대한 기록이 <삼국사기>를 비롯한 역사서에 남아 있다.

<삼국사기>에 실린 내용에 따르면 백제의 파멸은 고구려의 철저한 공작 때문이라고 한다. 애초부터 고구려 왕은 백제를 정복하고 싶어 했는데, 재주를 가진 승려 도림(道琳)이 공작원이 되기로 자청했다. 도림은 바둑 실력이 매우 뛰어나 기록대로라면 ‘국수(國手)’, 즉 한 나라에서 가장 훌륭한 솜씨라 할 만했다. 도림 스스로도 자신의 바둑 실력을 두고 ‘입묘(入妙)’라는 말을 써서 오묘한 경지에 오른 수준이라고 말했다. 때마침 백제의 임금은 ‘박혁(博奕)’을 무척 좋아했는데, 박혁이란 바둑과 장기 같은 말판놀이를 일컫는 말로. 요즘으로 치면 보드게임이나 컴퓨터 게임을 좋아하는 취미가 있었다고 볼 수 있겠다. 이후 도림은 백제 성을 찾아가 성문 앞에서 자신의 뛰어난 바둑 실력을 밝혔고, 이는 곧 왕에게도 전해졌다. 백제 임금은 도림의 절묘한 바둑 기술에 감탄하여 그를 곁에 두고 ‘상객(上客)’, 즉 높이 모시는 손님처럼 대접했다. 함께 바둑을 두면서 두 사람 사이는 더 가까워졌을 것이다.

후대의 기록이지만 중국의 역사서 <북사>는 백제에 대해 설명하면서 백제에는 백제 사람뿐 아니라 고구려 사람, 신라 사람, 중국 사람, 왜국 사람들이 뒤섞여 살고 있다고 묘사했다. 당시 백제가 다양한 이웃나라와 활발히 교류하고 무역했다는 점을 추측할 수 있는 대목이다. 이처럼 개방적인 백제의 문화는 초기 백제가 발전하는 원동력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도림은 백제의 이런 강점을 역으로 파고 들었다. 그는 백제 임금이 외국인인 자신을 가깝게 대해 주어 감사하다고 말하면서, 외국인인 자신이 보기에 백제의 문제점이 무엇인지 지적하며 백제 임금을 엉뚱한 길로 이끈다.

도림은 백제 궁궐에 수리해야 할 곳이 많고, 선대 임금의 무덤에도 무너진 곳들이 있으며, 홍수가 나면 한강물에 도시가 침수되는 구간이 많다는 점을 지적했다. 또한 그는 크고 위엄 있는 건물을 많이 지어 다른 나라가 함부로 공격하지 못하도록 국력을 과시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도림은 어차피 백제의 도성은 수비하기에 좋은 지형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에 전쟁이 일어나도 국경의 귀찮은 소란 정도일 뿐, 적을 막는 것은 어렵지 않다고 말했다. 그는 백제가 산과 강으로 둘러 쌓인 하늘이 베풀어 준 요새라고 했는데, 실제로 북쪽에 있는 고구려에서 송파구까지 공격해 오려면 북한산과 도봉산을 넘고 한강을 지나야 했다. 

백제 왕은 결국 도림의 이야기에 빠져 도성에 화려한 궁궐을 짓고 한강에 거대한 둑을 건설하는 등 수많은 공사를 일으켰다. 갑작스러운 건설 공사에 국고는 낭비되고 고된 노역에 시달린 백성들은 임금을 미워하기 시작했다. 고구려로 돌아간 도림은 나라가 혼란한 틈을 타 고구려 임금에게 백제를 공격하라고 한다. 당시 백제의 도성에는 북성과 남성 두 개의 성이 있었는데, 그 중 북성은 7일 만에 바로 무너졌다고 한다. 자신의 과오를 깨달은 백제 임금은 후회하며 아들을 남쪽으로 피신시키고 도성의 함락을 받아들인다. 이후 백제 임금은 지금의 광진구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아차성으로 끌려 가 그곳에서 처형당했다.

이 이야기는 백제에 관한 설화 중 제법 잘 알려진 편에 속한다. 한국사 전체에서 바둑에 관한 가장 유명한 사건이기도 하다. 그러나 나는 이 이야기에 몇 군데 의심할 만한 부분이 있다고 생각한다. 과연 도림은 정말 작심하고 고구려에서 건너온 첩자일까? 도림이 고구려 출신이고 게임을 좋아하던 백제 임금에게 큰 사랑을 받은 유명한 바둑 고수인 것도 맞지만 그 뿐일 수도 있지 않을까? 바둑을 잘 둔다는 이유만으로 왕의 신임을 얻은 도림을 견제하는 이들도 분명 있었을 것이다. 더욱이 훗날 고구려의 공격으로 백제의 도성이 파괴되자 사람들이 ‘이게 다 고구려에서 온 도림 때문’이라는 소문을 만들어낸 것은 아닐까?

딱히 유명인사는 아니지만 우리에게 비교적 잘 알려진 설화의 주인공 ‘도림’의 이름을 걸고 백제시대 도성이 위치했던 풍납토성이나 몽촌토성에서 바둑 대회나 장기 대회, 게임 대회 등을 개최해 보면 어떨까 하는 상상도 한번 해 본다. 천년을 지나 백제는 물론 고구려까지 모두 사라진 지금이라면 도림을 기억하자는 게임 대회 하나쯤 있어도 괜찮지 않을까? 지금은 올림픽공원으로 조성된 풍납토성과 몽촌토성 일대를 거닐며 아늑한 풍경을 보고 있으니 새삼 과거 느긋하게 놀이를 즐기던 백제 궁중의 풍요와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든다. 

INFO

올림픽공원

주소

서울 송파구 올림픽로 424

백제의 매사냥 문화를 엿볼 수 있는 곳

방이습지

초기 백제에 관한 유쾌한 이야기를 하나 고른다면 주군(酒君)이라는 사람에 대한 사연도 들어볼 만하다고 생각한다. 주군의 이야기는 일본 역사책인 <일본서기>에 나온다. 기록에 따르면 주군은 4세기 백제의 왕족이었다. 송파구에 살던 백제 임금의 먼 친척이었던 셈이다. <일본서기>에는 당시 주군이 백제를 방문한 일본 사신에게 무례를 저질러 쇠사슬에 묶인 채 일본으로 보내졌다고 써 있는데, 구체적인 묘사가 없는 것으로 보아 평소에 눈엣가시였던 주군을 일본 사신의 방문을 기회로 백제에서 추방시킨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공교롭게도 그의 이름 주군을 풀이하면 술꾼이라는 뜻이라는 점도 재미있다.

일본으로 추방된 주군은 사신단에서 빠져나와 일본 이곳저곳을 떠돌면서 산다.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얹혀 살았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정황상 그는 넉살 좋고 입담 좋고 낙천적인 사람이었던 것 같다. 주군은 ‘일본 임금은 내 죄를 용서했다’고 말하고 다녔다는데, 아마도 ‘내가 백제에서 죄인이지, 일본에서 죄인이냐’는 식으로 행동했던 것이 아닐까 짐작해 본다. 그는 일본과 다른 백제의 문화를 일본인들에게 자주 들려주는 이야기꾼이었을 것이고, 누가 술 한 잔 사주면 어린 시절 백제에서 보냈던 화려한 도시 생활을 자랑하듯 끝없이 말하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런 성격 때문인지 그는 일본 임금과도 친분을 쌓게 된다.

얼마 후 가을, 일본의 아미고(阿弭古)라는 사람이 이상한 새를 잡았다면서 임금에게 바친다. 일본 임금도 그 새를 보고 괴상하게 여겨 아는 게 많은 친구라고 생각한 주군에게 무슨 새인지 물어본다. 그러자 주군은 또 항상 그랬던 것처럼 백제 이야기를 꺼낸다. “이런 새는 백제에 많아요. 이 새를 길들이면 사람을 따르게도 할 수 있고요. 빨리 날기 때문에 다른 새를 잡는 데 쓸 수도 있어요.” 그는 그 새의 이름이 ‘매’라고 알려주며 실제로 매를 길들여 매사냥하는 모습을 보여줬는데, <일본서기>에는 ‘잠깐 사이에 수십 마리의 꿩을 잡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매사냥 역시 주군이 소싯적 백제에서 술을 마시며 놀러 다닐 때 재미로 익힌 취미였을 지도 모를 일이다.

백제는 매를 길들여 다른 새를 사냥하는 ‘매사냥 문화’가 발달한 나라로 추정된다. <삼국사기>에는 매사냥을 좋아하는 백제 임금이 있었다는 기록도 있고, 일부 학자들은 <삼국유사>에 실린 백제의 별명인 ‘응유(鷹遊)’를 풀이하면 ‘매가 논다’는 뜻이라면서 당시 나라의 상징이 매가 아니었을까 추측하기도 한다. 

마침 백제의 옛 중심지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방이습지에 황조롱이와 같은 매 종류의 새들이 살고 있다. 경관이 잘 보존되어 있어 주변을 유심히 보고 걸으면 어렵지 않게 야생동물을 관찰할 수 있는 아름다운 곳이다. 뿐만 아니라 방이습지에는 붉은배새매, 새매 등의 희귀한 새들이 서식하고 있다. 지금이야 그 새들을 붙잡아 매사냥할 수는 없지만 날아다니는 새들을 보며 술 한 잔 여흥을 즐길 만한 ‘주군’이라는 이름의 주점이 근처에 하나 있으면 어울리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INFO

방이동생태학습관

주소

서울 송파구 동남로 3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