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와 현재를 잇는 이야기

최근 몇 년 사이 여성의 주체성이 사회적 화두가 되면서 다양한 여성 서사가 풍성하게 등장하는 흐름이 만들어졌다. 다만 이는 어느 날 갑자기 대두된 움직임은 아니다. 애초에 시대를 앞선 영화들이 있었다. 개봉 당시에는 주류 문화에 저항하는 일탈 행위처럼 여겨졌으나, 시간은 그들의 가치를 제대로 바라보게 만들었다. 지금 우리는 시대를 관통해 우리에게 도착한 과거의 걸작들과 시대의 감각을 입고 재탄생한 고전들, 또 새롭게 고전이 될 작품들 사이를 풍요롭게 오가는 중이다.

걸작 여성 서사의 반열에서 영원히 선두에 설 <델마와 루이스>(1991)가 대표적이다. 개봉 당시 이 작품은 미국 사회에서 가장 ‘불편한 영화’ 중 하나였다. 두 여성이 우발적 살인을 저지르고 도주하는 범죄극이라는 점, 그들이 남성이 운전하는 차의 조수석에 앉는 게 아니라 직접 운전하며 달리는 로드무비라는 점에서다. 당시 미국 <타임>지의 표지 제목은 ‘어째서 델마와 루이스는 신경을 거슬리게 하는가(Why Thelma & Louise strikes a nerve)’였다. 지금은 어떤가? 우리는 그들의 범죄가 여성을 억압하고 위협하는 남성들을 향한 정당방위였다는 것을 이해하며, 개봉 30주년을 맞이해 시사회에 참석한 주연 배우 지나 데이비스와 수잔 서랜든의 키스 퍼포먼스에 열광할 수 있다. 인종을 뛰어넘어 여성의 우정과 연대, 행복의 가치를 이야기한 <바그다드 카페>(1987) 역시 시간이 지날수록 빛나는 작품이다. 이 영화는 황량한 사막에도, 사막 같은 마음에도 꽃은 피어난다는 것을 일러주며 날로 더 사랑받고 있다.

좋은 작품은 시대와 새롭게 조응하며 스스로 의미를 갖는다. 그것이 고전의 진정한 가치일 것이다. 리메이크는 좋은 예시다. 그레타 거윅이 연출한 <작은 아씨들>(2019)은 네 자매를 1800년대 소설 속 박제된 캐릭터가 아닌 현재와 공명하는 주체적 인물들로 탈바꿈했다. 에이미(플로렌스 퓨)를 조(시얼샤 로넌)만큼이나 야심 있는 인물로 바라본 재해석이 특히 탁월하다. 1980년대 전설적인 원작을 젠더 스와프(컨텐츠에서 주인공의 성별을 전환하는 것)해 만든 <고스트 버스터즈>(2016) 역시 빼놓을 수 없다. 이 작품은 네 명의 여성 캐릭터의 유쾌한 앙상블 코미디다. 백치 미남 케빈(크리스 헴스워스)을 통해 수많은 영화들이 관성적으로 그렸던 젠더 고정관념을 꼬집는 미러링도 놓치지 않는다. 주인공들의 성별이 바뀌었다는 이유만으로 개봉 전부터 일어났던 젠더 논쟁은 아직도 의아하다. 30년 전 어딘가 조금 부족한 네 사람이 유령 소탕으로 영웅이 됐듯, 리메이크 또한 사회의 비주류 여성 넷이 자신들의 방식으로 세상을 설득하며 소시민 영웅으로 거듭나는 이야기이지 않나. 이 영화는 결코 원작의 명성이나 재미를 해치지 않는다. 새로운 재미를 제시할 뿐이다.

그리고 여기, 2000년대 여성 서사의 뉴 클래식으로 꼽을 만한 영화들이 있다. 당신이 이미 발견한 작품들이라면 안목을 높이 산다. 아직 보지 않았다면 그 또한 좋다. 걸작을 발견할 기쁨의 기회가 남아있는 것이니 말이다.

21세기 ‘뉴 클래식’ 무비

<킬 빌-1, 2부> (2003~2004)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이 동양 무술을 향한 자신의 사랑을 집대성한 영화다. 고난도 액션을 펼치는 모든 여전사의 역사는 이소룡을 연상시키는 노란색 트레이닝복 차림으로 활약하는 <킬 빌>의 우마 서먼으로부터 새롭게 쓰인다. 주인공은 피의 복수를 치르는 전직 암살자 베아트릭스 키도, 활동명 ‘블랙 맘바’다. 피투성이의 웨딩드레스 차림으로 처음 등장한 키도는 사무라이 검과 총으로, 때론 맨손으로 차갑고 긴 복수를 이어간다. 액션의 쾌감이 상당한 작품이지만 그 이상의 의미도 존재한다. 키도의 여정은 숱한 성적 학대와 폭력의 역사를 쳐부수고 끝내 사랑하는 딸을 지켜내는 강인한 여성의 이야기인 것이다.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2006)

모두에게 이용만 당한 착하고 안쓰러운 여자, 아파트 벽에 ‘태어나서 죄송합니다’라고 써놓고 세상을 떠난 여자. 모두가 혐오했지만, 사실 마츠코(나카타니 미키)는 최선의 인생을 살았다. ‘인간의 가치는 누군가에게 무엇을 받았는가가 아닌 무엇을 주었는가가 결정한다’는 영화 속 가르침에 의하면, 마츠코는 모든 이에게 조건 없는 사랑을 주고 떠났다는 점에서 가장 위대하고 가치 있는 사람이었다. 그렇게 이 영화는 우리에게 인생의 의미를 되묻는다. 마츠코의 기구한 인생은 팝업북을 펼친 것처럼 화려한 뮤지컬 구성 아래 재구성된다. 인생의 분기마다 전혀 다른 사람이 된 듯 소화하는 나카타니 미키의 폭넓은 연기도 인상적이다.

<미쓰 홍당무>(2008)

영화 속 여주인공은 꼭 예쁘고 착하고 호감 가는 인물이어야 하나. 이 영화는 그 모든 것을 반대로 가는 한국영화 전대미문의 캐릭터, 양미숙(공효진)을 탄생시키며 고리타분한 고정관념을 부순 작품이다. 질투, 착각, 온갖 염려증을 과도하게 안고 있는 데다 안면 홍조증까지 가진 ‘비호감 덩어리’ 양미숙. 대체 이런 사람이 어디 있냐는 의문이 든다면 이렇게 생각해 보라. 양미숙이 가진 비호감 항목 중 내가 가진 것이 정말 단 한 가지도 없는지를. 이 영화는 별나다는 이유로 삶에서 계속 주변부로 밀려난 인물들을 그의 인생 한가운데로 끌어당겨 앉히려는 시도다. 양미숙이 없었다면, 단연코 이경미 감독의 세계관에 <비밀은 없다>(2015)의 연홍(손예진)과 <보건교사 안은영> 시리즈의 히어로 안은영(정유미)도 없다.

<프란시스 하>(2012)

그 누가 흑백 화면이 누벨바그 시대의 전유물이라 했던가. 이 영화 앞에서는 얘기가 달라진다. 노아 바움벡 감독은 자기 공간 하나를 갖기 위해, 그야말로 먹고살기 위해 뉴욕 한복판을 내달려야 하는 야무지지 못한 청춘의 이야기를 그린다. 이 영화를 인상적으로 만드는 건 생생한 현실감을 지닌 프란시스(그레타 거윅)의 캐릭터 그 자체다. 일과 사랑, 꿈을 고민하며 자기 자리를 찾아가려는 그의 이야기는 ‘2000년대 새로운 누벨바그’라 할만하다. 공감 못할 난해함보다는 현실 밀착형 친근함으로, 낭만성보다는 구질구질해도 현실적인 면모들로 무장한 작품. 제목의 비밀이 밝혀지는 마지막 장면에 이르면 감탄 섞인 웃음이 절로 난다.

<우리들>(2015)

작품 안에서 어린이를 바라보는 시각 자체를 바꿨다는 점에서 윤가은 감독의 접근은 센세이션 그 자체다. 이 영화 이전 대부분의 작품에서 어린이 캐릭터는 어른을 각성시키는 최후의 배경처럼 복무해 왔다. 어쩌다 아이들만 등장한다 해도 그건 어른의 말과 시선으로 대상화한 결과물에 가까웠다. 하지만 <우리들>은 ‘진짜’ 아이들의 유기적인 세계다. 윤가은 감독의 영화에서는 오직 아이들만이 자신들을 둘러싼 관계의 어려움을 해결할 수 있는 주체들이다. 자기 자신보다 가족과 친구의 마음을 더 살피는 속 깊은 여자아이들의 이야기는 그렇게 멋지고 당당하게 세상에 등장했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2019)

셀린 시아마 감독은 초상화라는 모티프로 두 여성의 사랑을 관통하며 진정한 ‘여성적 시선(female gaze)’이 무엇인지 보여준다. 여성 캐릭터들을 대상화하지 않는 시선, 오직 여성들만 존재하는 세계가 이 안에 있다. 여성 예술가는 자신의 이름을 내건 전시회조차 열 수 없으며 동성 간 사랑은 당연히 금기되는 18세기. 영화는 두 주인공을 통해 이 모든 시대적 억압을 뛰어넘는다. 해당 단어들이 가장 어울리지 않는 시대 풍경의 한 가운데에서, 평등과 주체성 그리고 평생 기억될 사랑의 순간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영화는 정말 완벽하게 아름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