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랜드 간의 컬래버레이션, 보통 ‘콜라보’라고 부르는 협업이 패션 사에 등장한 지 꽤나 시간이 흘렀다. 하지만 예상치 못했던 패션 브랜드 간의 만남은 시들해지기는커녕 산업의 경계를 넘나들며 확장 중이다. 하이패션부터 캐주얼한 스트리트 패션 브랜드는 물론이고 이제는 밀가루, 맥주, 가구 회사에서도 콜라보를 볼 수 있다. 기념행사용 굿즈 티셔츠 같은 게 아니다. 진심을 다해 제대로 만들어서 소비자들의 취향을 저격한다. 패션 콜라보의 초창기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주목할 만한 사례를 살펴보며 브랜드 컬래버레이션을 되짚어 봤다.
- 글
- 박세진
패션은 각각의 브랜드가 고유의 이미지를 만들고 그렇게 만들어진 특유의 세계관으로 사람들을 매혹시키고 끌어당기는 게 기본 원칙인 세계다. 다른 브랜드 제품으로 쉽게 대체할 수 있다면 굳이 자기 브랜드를 선택할 이유가 없어지기 때문에 서로 ‘다름’은 기본적인 전제이자 만들어나가야 할 방향이다. 특히 고급 제품에서 이런 면은 두드러진다. 브랜드 이름만 들어도 사람들의 머릿속에 이미지가 딱 떠오를 정도가 되어야 한다.
다른 브랜드와의 콜라보는 이런 방향을 역행한다. 그럼에도 왜 하는 것일까? 물론 대중의 관심을 끌 수 있고 잘 팔리기 때문이다. 더 중요한 건 브랜드가 기존에 갖지 못한 이미지를 광고보다 훨씬 효과적으로 채워 넣을 수 있기 때문이다. 협업을 통해 각 브랜드는 고수해오던 전형적인 디자인에서 벗어나 신선함을 불어넣고, 새로움으로 사람들에게 다가갈 수 있다.
예술과 대중문화의 교류에서 출발한 콜라보의 역사
협업의 초창기 모습은 20세기 초반에 볼 수 있다. 19세기 중반, 패션은 부유층의 옷을 제작하는 장인의 세계에서 디자이너가 창조적인 역량으로 자신의 제품을 선보이는 장으로 변화한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패션 디자이너들은 당대의 미술가, 문인, 지식인 등과 교류하며 상류층의 문화, 즉 고급문화로 진입했다.
1930년대에 활동한 디자이너 ‘엘자 스키아파렐리’도 당대 초현실주의 예술가들과 많은 교류를 나눴고, 그의 패션 디자인도 초현실주의 흐름을 따라가고 있었다. 특히 ‘살바도르 달리’와 협업을 진행해 달리의 작품인 ‘바닷가재 전화기’에서 모티프를 따온 바닷가재 드레스를 선보였다. 이러한 협업을 통해 패션은 점차 예술과 대중문화 사이에서 고유한 영역을 만들어 갔다.

지금의 콜라보가 등장하고 이후 패션 사에 큰 영향을 준 예로 2004년 ‘H&M’과 ‘칼 라거펠트’의 프로젝트를 떠올릴 수 있다. 두 브랜드는 대중 마켓과 럭셔리 브랜드로 서로 다른 영역에 있었다. H&M이 중심이 된 콜라보 컬렉션을 통해 사람들은 훨씬 저렴한 가격으로 칼 라거펠트의 흔적이 새겨진 옷을 샀다. H&M이 패스트패션을 넘어 고급 이미지를 갖게 된 것도 물론이다. 당시 혁신적이라고 할 만한 이 야심 찬 시도는 큰 성공을 거뒀다.

현대 패션의 콜라보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데에는 조금 더 깊은 배경 설명이 요구된다. 고급 패션은 전통 장인 정신과 고급 소재의 사용 등이 중요한 요소였다. 물론 이는 지금도 여전히 최고급 브랜드가 갖춰야 할 핵심 가치이자, 제품의 특별함과 희소성을 부여하는 중요 요소다. 그리고 이런 차이는 대중적인 브랜드가 점유하는 위치와 다른 소비층을 만든다. 기본적으로 구매자층이 다르기 때문에 협업 같은 변칙적 접근을 할 필요는 없었다.
그러나, 2000년대 들어서면서 상황이 점차 달라졌다. 밀레니얼, Z세대가 차례로 등장하고 인터넷과 SNS, 유튜브를 중심으로 성장한 이들이 패션을 주도하는 소비층이 된 것이다. 이들은 부를 축적해 고급 패션의 소비자가 된 후에도 익숙하고 편안한 실용적인 옷을 선호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제품과 다른 점이 필요했는데, 티셔츠와 스니커즈, 후드와 바람막이 같은 캐주얼한 복장에 더해진 유니크함이었다. 이 특별함은 힙합 뮤지션이나 팝스타, 운동선수가 입었거나 한정판 혹은 의미심장한 스토리가 있다는 식으로 구현됐다. 한편, 다른 방식으로도 만들 수 있었다. 앞서 소개한 H&M 제품에 씌워진 칼 라거펠트의 터치가 바로 그렇다. 이 콜라보는 시대 흐름을 일찌감치 내다본 결과였다.
패스트패션과 디자이너 브랜드, 서로의 영역을 넘나들다

패스트패션과 디자이너 콜라보의 대표적인 사례로 2009년 ‘유니클로’와 디자이너 ‘질 샌더’의 만남, ‘+J’ 프로젝트를 빼놓을 수 없다. 이 콜라보는 국내에서도 큰 반향을 일으켰다. 사람들이 매장 앞에 줄을 서 매진 행렬이 이어지는 등 엄청난 인기를 끌었고, 이후 수많은 브랜드에서 콜라보 컬렉션을 내놓는 시발점이 되었다. +J는 이후 몇 시즌을 이어오다 한차례 중단됐으나 첫 번째 콜라보 컬렉션을 재발매하기도 하고, 2021년 다시 등장해 두 시즌을 이어가는 등 여전한 인기를 과시했다.

패션 업계를 둘러싼 환경 변화가 완전히 자리 잡고 가속화되기 시작한 2017년에 등장한 ‘루이 비통’과 ‘슈프림’의 콜라보도 주목할 만하다. 루이 비통은 1854년 파리에서 고급 트렁크 제작으로 시작해 지금까지 무수한 세월과 변화 속에서도 많은 명작을 남긴 고급 패션 브랜드의 대명사다. 반면, 1994년 뉴욕에서 스케이트보드 문화를 바탕으로 설립된 브랜드 슈프림 NY은 과감한 광고와 박스 로고, 특유의 미니멀한 디자인으로 스트리트 패션 분야에 지대한 영향을 미쳐왔다.
보다시피 두 브랜드는 각자의 위치에서 탑의 자리에 있었지만, 점유하는 영역은 전혀 달랐다. 하지만 콜라보를 통해 이 둘의 영역이 얽히기 시작했다. 루이 비통은 새로운 세대와 소비층에 브랜드를 어필했고, 슈프림 역시 스트리트 패션 안에서 어떠한 위치에 올라와 있는지 과시하며 저변의 확대를 꾀했다. 두 브랜드의 만남은 하이패션과 스트리트 패션이 향후 어떠한 방향으로 흘러갈 것인지 세상에 널리 알리는 계기를 만들었다.
럭셔리 브랜드 간의 흥미로운 콜라보


럭셔리 디자이너와 패스트패션 혹은 아웃도어, 스포츠 브랜드 등 서로 다른 영역의 콜라보 프로젝트와 더불어 더욱 흥미로운 협업도 등장했다. 바로 고급 브랜드 간의 협업이다. 대표적으로 ‘몽클레르’의 ‘지니어스 프로젝트’를 들 수 있다. 몽클레르는 1950년대에 스키 제품 출시로 시작해 다운 의류에 특화된 럭셔리 패션 브랜드다. 2017년 시작된 몽클레르의 지니어스 프로젝트는 ‘JW 앤더슨’, ‘발렌티노’의 ‘피에르파올로 피치올리’, ‘크레이그 그린’, ‘시몬 로샤’ 등 한창 활동 중인 유수의 디자이너들과 컬렉션을 선보이며 드롭 방식으로 제품을 출시하고 있다. 협업 중인 다른 브랜드가 따지고 보면 겨울 의류 분야의 만만치 않은 경쟁자들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몽클레르는 마치 큐레이션 하듯이 판을 제공하는 역할을 한다. 이 프로젝트는 지난해 ‘몬도지니어스’라는 이름으로 서울을 포함한 전 세계 몇몇 도시에 몰입형 디지털 체험을 여는 등 실험적인 시도를 거듭하며 고유의 영역을 확장해 가고 있다.
또 다른 럭셔리 브랜드 간의 협업으로 2019년에 있었던 ‘발렌티노’와 ‘언더커버’의 만남도 꽤 흥미진진했다. 두 브랜드는 함께 ‘베토벤’, ‘에드거 앨런 포’, ‘우주선’ 등의 프린트를 그리고, 그 프린트를 각자의 옷에 활용해 전혀 다른 주제의 컬렉션을 내놓았다. 이와 같은 실험적인 시도는 패션을 더욱더 새롭게 만드는 묘미이자 즐거움이라 할 수 있다.

한편, 2021년 여름에는 ‘사카이’와 ‘장 폴 골티에’가 ‘오트쿠튀르’ 컬렉션과 드롭 제품을 내놓았다. 또 ‘펜디’의 ‘킴 존스’와 ‘베르사체’의 ‘도나텔라 베르사체’도 ‘더 스와프(The Swap)’이라는 타이틀로 베르사체가 만든 펜디, 펜디가 만든 베르사체 컬렉션을 선보였다. 두 브랜드가 각자의 컬렉션 속에서 한데 뒤엉켜 있는 낯선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해를 거듭할수록 새로워지는 콜라보의 세계

지난해 연말 출시된 ‘구찌’와 ‘발렌시아가’의 ‘해커 프로젝트’도 있다. 하나의 옷에 구찌와 발렌시아가의 아이코닉한 로고를 동시에 볼 수 있었던 이 프로젝트는 구찌를 ‘침입과 변형’으로 이루어진 실험실인 ‘해킹 랩’으로 바라보며, 패션 업계 내에서 진정성과 모방 및 도용이 가지는 의미에 관해 탐구하는 주제를 담고 있었다. 두 브랜드는 같은 케링 그룹 소속이지만, 상당히 다른 역사를 지니고 있다. 오랜 시간 서로 다른 길을 걸어온 두 브랜드가 변화를 주도하며 새로운 세대에 어필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는 건 멋진 일이다. 더 나아가 구찌와 발렌시아가는 개별적으로 여러 콜라보를 진행하기도 했다. 특히, 발렌시아가는 지난해 만화 ‘심슨 가족’과의 콜라보로 심슨 가족 캐릭터가 제품에 사용되는 것뿐만 아니라 유명 인사들과 함께 패션쇼 모델로 등장하는 애니메이션을 만들어 화제가 됐다.


발렌시아가의 경우처럼, 애니메이션 캐릭터와 협업도 콜라보의 주요 패턴 중 하나다. 구찌는 2013년 만화 ‘죠죠의 기묘한 모험’과 콜라보를 진행해 프린트가 들어간 제품을 출시하고 매장 인테리어를 바꾸며, 구찌 브랜드가 등장하는 특별판 만화를 제작했다. 이 밖에도 ‘언더커버’는 ‘에반게리온’ 시리즈, ‘로에베’는 ‘스튜디오 지브리’의 ‘이웃집 토토로’, ‘컨버스’는 얼마 전 ‘포켓몬’과 협업한 스니커즈를 선보였다. 이처럼 만화 캐릭터가 사용된 제품은 어떤 이들에게는 어린 시절 향수와 추억을 불러일으키고, 또 어떤 이들에게는 자칫 다가가기 어려운 인상을 주는 고급 브랜드에 귀엽고 친근한 이미지를 심어주어 소비자층의 확대를 도모하는 계기를 만든다.


때때로 콜라보는 심층적인 결과물로 완성되기도 한다. ‘알렉산더 맥퀸’은 2020년 여름부터 웨일스 남부 계곡 마을에 사는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자수사, 직원, 교육팀을 보내 청소년들에게 워크숍을 여는 등 몇 달간의 협업을 진행했다. 알렉산더 맥퀸의 ‘사라 버튼’은 2020년 FW 컬렉션을 준비할 때 이 지역의 풍경과 공예, 시, 문학에서 영감받았다고 한다. 이러한 식의 협업은 단순히 제품 몇 가지로 나오는 게 아니라 훨씬 포괄적인 창조성으로까지 연결된다. 양쪽 모두 시야를 확장할 수 있는 것은 물론, 크레이티브 한 인사이트를 얻어 그 결과를 시즌 컬렉션을 통해 확인해 볼 수 있다는 데 의의가 있다.
패션 콜라보의 미래
지금까지 이색적인 콜라보 사례를 살펴보았지만, 콜라보가 항상 좋은 결과와 성공으로만 이어지는 건 아니다. 그 수가 워낙 많아지면서 이제는 실패 사례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그저 생각지도 못한 브랜드가 만났다는 것만으론 설득력이 부족하다. 패션 흐름을 주도하는 멋진 제품을 내놓아야 한다는 기본 전제는 변하지 않고, 콜라보에 집중한답시고 기존에 쌓아 두었던 브랜드의 세계관이 흐려져도 곤란하다. 브랜드 고유 이미지가 분명할수록 협업의 신선함은 커진다.
어쨌든 우리는 콜라보의 세상을 살고 있다. 덕분에 토토로가 그려진 ‘로에베’ 가방이나 구찌와 발렌시아가의 로고가 혼재된 자켓, ‘오프-화이트’의 수장이었던 ‘버질 아블로’가 디자인한 ‘이케아’의 카펫처럼 재미있는 제품을 입고, 쓸 수 있게 되었다. 올해는 또 어떤 브랜드의 콜라보가 나올까? 대체 어떤 유니크한 협업이 패션 업계에 등장할지 기대하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