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사 전 식욕을 돋우기 위한 전채요리, ‘애피타이저’는 다채로운 식사를 시작하는 일주문과도 같다. 코스의 첫인상을 담당하는 메뉴인 만큼, 애피타이저에 많은 공을 들이곤 한다. 첫인상 좋은 애피타이저는 어떤 모습일까? 답은 제철 식재료에 있다. 서울의 한 프렌치 레스토랑 오너 셰프인 나는 매 계절, 음식을 처음 마주한 손님의 미소를 상상하며 계절의 기운을 접시에 담아낸다.
- 글
- 김은희
식사의 프롤로그, 애피타이저
애피타이저(appetizer)는 코스 초반에 나오는 음식이다. 애피타이저 전에 나올 수 있는 메뉴는 아뮤즈 뷔쉬(amuse-bouche)가 있다. 레스토랑에 방문한 고객을 반기는 의미로 제공하는 아뮤즈는 대부분 손으로 집어먹을 수 있는 카나페 또는 핑거푸드 형태를 하고 있다. 한 가지 또는 세 가지의 아뮤즈가 대부분이지만, 서울의 파인다이닝 레스토랑은 5~7가지의 멋진 아뮤즈를 내는 곳이 많아지는 추세다.


아뮤즈를 먹고 나면 본격적인 식사 메뉴가 나온다. 애피타이저는 식욕을 돋우는 역할을 하는 음식이라 대부분 소량이며 신맛을 갖고 있다. 요즘은 메뉴의 카테고리 분류가 모호해졌는데, 5~8가지 음식이 나오는 파인다이닝에서는 어떻게 보면 애피타이저가 여러 종류인 셈이다. 새콤한 레드와인으로 만든 드레싱에 신선한 채소를 버무린 샐러드나 다양한 채소를 작게 잘라 버무린 ‘찹샐러드’, 자몽을 곁들인 허브 소금에 재운 ‘연어 그라브락스’, 감자와 대파로 만든 차가운 감자 수프 ‘비쉬스와즈’ 등 다양한 종류가 있다.
예전에는 신맛이 도드라지는 차가운 전채요리가 주를 이뤘는데, 가짓수가 늘어나면서 따뜻한 애피타이저로 분류된 음식들도 많아졌다. 차가운 애피타이저 뒤에 따뜻한 애피타이저가 나오거나, 둘 중 한 종류만 나오기도 한다. 따뜻한 애피타이저로는 버터소스에 익힌 라비올리, 팬에 구운 스윗브레드, 노릇하게 팬에 구운 푸아그라, 생면 파스타 등이 있다. 재료의 경우 규정짓기 모호하지만, 메인 요리에 쓰는 생선이나 육류는 중복될 수 있으므로 자연스레 피하는 편이다.
셰프의 정원
올해로 13년째 한국의 건강한 제철 식재료로 만드는 코리안 프렌치 레스토랑을 운영하면서 봄, 여름, 가을, 겨울 한국의 계절을 담아 메뉴를 바꾸고 있다. 매 시즌 새로운 메뉴를 만드는 것은 중압감이 꽤 큰일이다. 3개월마다 코스 메뉴를 바꾸는 일이 쉬울 것 같지만, 시간에 항상 쫓기고 있기에 메뉴를 바꾸고 나면 꽤 큰일을 해낸 것 같은 성취감을 느끼곤 한다.

매년, 매 계절 특히 빛나는 식재료가 있다. 그런 재료를 만나면 자연스레 메뉴가 머릿속에 떠오른다. 거의 하루 종일 음식 생각을 하고, 주방에서 생활한 것이 촉이 생긴 이유이리라. 그중 제일 변화가 크고 계절감을 맛볼 수 있는 메뉴가 바로 ‘계절 애피타이저’다.
애피타이저면 그냥 애피타이저이지 앞에 ‘계절’이란 단어를 굳이 쓴 이유는 우리 가게의 정체성 때문이다. 클래식한 정통 프렌치보다는 한국인 셰프 김은희가 한국에서 한국의 식재료, 특히 채소로 프렌치 요리를 만들다 보니 자연스레 계절감이 담길 수밖에 없다.


은퇴하신 아버지가 취미로 밭에서 기르는 돼지감자, 초석잠, 하늘마 등 채소와 서울에서 가장 좋아하는 경동시장에서 발견한 나물과 뿌리채소를 메뉴에 넣는다. 노지 재배를 하는 농부들이 신선한 농산물을 직접 선보이는 마르쉐 장터도 부지런히 따라다닌다. 나에게 요리는 업이자 취미인 셈이다.
채소 꽃이 피어난 스프링 플레이트,
입맛 살리는 여름 수프



특유의 아련한 연둣빛으로 만물이 소생하는 봄을 제일 좋아한다. 아름다운 채소 꽃 가득한 마르쉐 장터에 다녀오면 봄의 애피타이저는 어느새 봄꽃 천지가 된다. 팬에 구운 가리비에 제주산 흰 아스파라거스를 곁들인 애피타이저는 식용꽃이 열 가지 정도 올라가기도 하는데, 이런 날은 아침에 마르쉐에 서둘러 다녀온 날이다.
무더운 여름이 되면 왠지 몸보신용 식재료를 기웃거리게 된다. 붕장어나 전복을 부드럽게 익히고, 토마토와 바지락 육수를 뽑아 맑은 삼계탕처럼 수프를 끓인다. 다양한 색과 형태를 뽐내는 여름 토마토도 함께 곁들여낸다. 여름의 향긋함을 연상케 하는 바질이나 딜 같은 허브 오일로 수프를 마무리한다. 육수 맛이 기가 막히다며 접시를 들고 냉면 국물처럼 원샷 하는 분들을 보면 짜릿하다. 주방에서 일하는 우리들은 땀을 뻘뻘 흘리고 있지만 말이다.
가을이 담긴 버섯 요리,
제철 방어를 올린 겨울 디너



가을이 되면 버섯의 감칠맛이 나를 끌어당긴다. 65~75도 사이의 오일에 양송이, 표고버섯과 타임과 로즈메리, 마늘을 듬뿍 넣어 버섯 콩피를 만들어 둔다. 양송이버섯을 양파와 볶다가 치킨 스톡과 우유, 생크림을 넣고 뭉근히 끓여 믹서기에 곱게 갈면 버섯 퓌레가 완성된다. 도예가의 손길이 닿은 도자기 위 둥근 몰드에 버섯 퓌레를 넣고 버섯 피클, 가을 색이 나는 브론즈 펜넬을 올린 뒤 가을에 맛있는 대하를 구워 접시에 얹는다. 미리 만들어 놓은 버섯 콩피와 말린 버섯을 얹어 내면, 오동통한 식감의 버섯과 탱글한 대하의 조화 덕에 식사하시는 분들의 ‘행복해’ 라는 감탄사를 종종 들을 수 있다.
추운 겨울, 기름 오른 고소한 방어를 생선 가게 아주머니가 가져오시면 새로 배운 일식 손질법으로 정성껏 살을 발라 숙성시킨다. 새송이버섯 콩피와 채소로 담근 피클을 다진 뒤 가을에 수확한 토종 생강으로 만든 생강오일, 겨자오일에 슥슥 버무린다. 겨울에는 무, 돼지감자, 콜라비가 맛있다. 새하얀 접시에 방어타르타르를 단정하게 올리고 그 위에 동전 크기로 자른 콜라비와 돼지감자피클을 번갈아 올린다. 이 돼지감자피클은 아버지가 길러 주신 것으로 1년 전 담아 놓은 것이다. 고흥 유자로 만든 드레싱을 안쪽에 얹어 주고, 위에 작은 꽃들을 장식하면 얼어붙은 겨울 호수가 연상된다. 식사 전에 속을 달래시라고, 햇돼지감자로 끓인 고소한 스프를 홍차 잔에 따뜻하게 내어 드린다. 아, 너무 예뻐서 드실 수 없단다.
예쁘고 맛있어서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간다는 고객분들의 눈인사가 제일 좋아하는 일이다. 주방에서 매일 장시간 일하는 요리사가 즐길 수 있는 특권이 아닌가 싶다. 추운 겨울에 더 추운 주방에서 극한으로 보내고 나면 어느새 다시 봄이 온다. 그러면, 또 푸릇한 식재료를 만나 어떻게 계절 애피타이저로 변신시킬지 즐거운 고민을 시작한다.
INFO
더 그린테이블
운영
수-일 12:00~22:00, 월-화 휴무
문의
02-591-2672
Photograph / 김은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