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티스트 류정헌은 어릴 적부터 음악에 심취해 카세트테이프를 모으며 자랐다. 당시 들었던 명반들은 기타리스트로서 그의 세계를 구축하는 데 명백한 기반이 되었고, 훗날 카세트테이프를 이용한 기술 ‘테이프 루프(Tape loop)’를 만나며 운명처럼 사랑에 빠졌다. 작업을 할 때면 마치 명상하는 것처럼 편안해진다는 아티스트 류정헌과 그의 솔로 프로젝트 ‘아날로그 인베이전(Analog Invasion)’에 대해 깊은 대화를 나눴다.
- 글
- GEEP
- 사진
- 김도현
INTERVIEW



안녕하세요. 자기소개 부탁드려요.
사운드 아트 프로젝트 ‘아날로그 인베이전’을 진행하고 있는 류정헌입니다. 본업은 기타리스트이며 오랫동안 밴드 ‘코어매거진(COREMAGAZINE)’에서 활동했고 현재는 밴드 ‘에이치얼랏(H a lot)’의 기타리스트입니다.
‘아날로그 인베이전’은 어떤 계기로 시작하셨나요?
인생의 첫 밴드이자 21년간 몸담았던 밴드인 ‘코어매거진’을 올해 초, 제 손으로 해체 시켜야만 했어요. 정말 사랑한 밴드였지만 동시에 저를 너무 지치게 했거든요. 해체 후 공허함은 상상 이상이었고, 깊게 파인 구덩이에 뭐라도 채워 넣어야 했어요. 때마침 코로나 사태로 활동도 어려워져서 매일 집과 작업실에 처박혀 닥치는 대로 아무거나 보고, 듣고, 만들었어요. 그러던 중에 우연히 알레산드로 코르티니(Alessandro Cortini)라는 이탈리아 출신 뮤지션의 인터뷰를 보게 됐고 연관된 것들을 찾아 깊이 파고들다 테이프 루프를 알게 됐습니다. 너무 재밌어 보였어요. 그때부터 두 달간 이베이 등을 뒤져 장비를 사 모았죠.


프로젝트 이름은 어떻게 지으셨나요? 말 그대로 ‘아날로그의 침략’이라고 해석하면 될까요?
진입장벽이 높았던 미국 음악계에 영국 록 음악이 열풍을 일으킨 시기를 뜻하는 ‘브리티시 인베이전’에서 차용했어요. 그리고 아날로그를 아무런 이해 없이 소비하는 트렌드를 꼬집기 위해 조금 공격적으로 지은 것도 있고요. (웃음) 처음에는 ‘Analog Invasion’의 약자인 ‘AI’로 부르려고 했어요. 인공지능은 디지털에 근접해 있기도 하고. ‘Artificial Intelligence’에 반대적인 것을 의미하는 ‘Analog Invasion’을 보여주고 싶다는 의도가 담겨 있기도 하죠.
깊은 의미가 있었네요. 처음 생각하셨던 ‘AI’는 왜 사용하지 않게 됐나요?
코어매거진 앨범을 작업해 주신 김용일 작가가 이번 프로젝트 컨셉을 디자인을 했는데, 그분이 반대했어요. (웃음) 직관적이지 않고 무엇보다 예쁘지 않다는 의견이었죠. 그래서 지금의 ‘아날로그 인베이전’이 된 거죠.



유튜브에 올린 제작 영상을 보면 굉장히 섬세한 작업 같은데, 테이프 루프 제작에 관해 설명 부탁드려요.
우리가 보통 음악을 들을 때 쓰는 카세트테이프는 1초에 4.75cm를 주행합니다. 먼저 마그네틱 필름을 원하는 길이만큼 잘라서 연결해요. 예를 들어 10초 길이의 무한 루프를 만들고 싶다면 47.5cm 길이로 자른 마그네틱 필름을 이어 붙여 링을 만들죠. 그걸 다시 카세트테이프에 ‘어떻게든’ 집어넣는데, 여기서 예측하지 못했던 모양이 나오게 돼요. 플레이어에 넣고 재생하면 전원을 끄기 전까지 10초간의 무한 반복이 시작됩니다. 사실, 국내에선 배우거나 물어볼 곳이 없어서 처음에는 시행착오가 많았어요. 그래서 한글로 된 제작 영상도 만들게 되었고요. 누군가는 그 영상을 보고 함께 만들어볼 수 있다면 좋겠어요.
소재를 정할 때 영감은 주로 어디서 얻으시나요?
저는 돌아다니는 걸 엄청 좋아해요. 여행은 물론이고 아무 골목이나 걷고, 노지에서 캠핑을 하기도 하고요. 그러다가 마음이 동하면 뭔가를 만들어요. <그래스랜드>는 은평구의 진관사 언덕에서 찍은 거예요. 우연히 가게 된 곳인데 너무 좋아서 작품 구상도 할 겸 4일 연속으로 갔을 정도죠.
자연을 배경으로 녹음하다 보면 뜻밖의 상황도 있을 것 같아요.
물론 많았죠. 학생들이 지나가면서 험한 욕을 해서 못 쓴 영상도 있고, 부산 송정 해변에서는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게 너무 방정맞게 소리 지르며 서핑하는 외국인에… 비둘기까지 가세해서 플레이어를 넘어뜨려 당황한 적이 있어요.
정말 예측 불가네요. 그래서 더 매력적인 것 같아요. (웃음) 혹시 특별히 기억에 남는 작품이 있나요?
당연히 모두 다 기억에 남고 재밌었지만 아무래도 첫 작품 <마린시티>가 기억에 남아요. 그날 사용한 음악이 앞서 해체를 말씀드렸던 코어매거진의 미발표 데모곡 인트로였기에 녹음하면서 조금 쓸쓸했어요. 그리고 기술적으로 가장 어려웠던 윤여정 배우의 오스카 수상소감을 이용한 루프도 기억에 남고요.





정헌님의 프로젝트는 반복적인 음악을 사용하는 ‘앰비언트 뮤직’으로도 불리죠. 이 장르가 유튜브에서 최근 인기라고 하는데, 리스너들의 반응은 어때요?
사실 잘 모르겠습니다. “이게 뭔데? 뭐 하는 건데?”라는 질문도 많이 받아봤어요. 앰비언트는 지극히 개인적인 콘텐츠라고 생각해요. 공연이 활발히 이루어질 수 있는 장르도 아닌데다 명상처럼 개인의 마음과 시선에 집중하다 보니 공유보다는 사유의 느낌이 강한 것 같아요. 왠지 모를 매력에 이끌리는 어떤 계기가 생기지 않는 한, 일반적으로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갈수록 앰비언트 음악의 진가를 많은 사람들이 알게 될 것 같아요. 언론사에서도 정헌님의 작품에 주목하고 있고요. 앞으로의 작품 활동도 기대되는데요, 올 하반기 계획 혹은 목표는 무엇인가요?
거창하게 ‘사운드 아트’라고는 하지만 어차피 저는 뮤지션이니 결국 이 프로젝트로 음악과 만나지 않을까요. 언젠가는 꼭 공연과 함께 전시회를 열고 싶어요. 많은 관심 부탁드려요!
저희 9월호 주제가 <뉴클래식>입니다. <아날로그 인베이전> 프로젝트처럼 아날로그가 다시 재해석되며 주목받고 있죠. 정헌님에게 아날로그의 매력은 무엇일까요?
디지털은 편리하고 영리하죠. 아날로그는 불편하고 둔해요. 하지만 아날로그는 대할 때마다 느낌이 달라서 좋아요. 디지털의 반복은 죽을 때까지 똑같지만, 테이프 루프는 매번 달라요. 심지어 돌다가 끊어지기도 해요. 반복이지만 예측 불가능의 생명체 같아서 좋아요. 우리 삶도 정말 징그러울 만큼 반복되잖아요. 하지만 그 안에 여러 변수가 있기에 좀 덜 지루한 것 아닐까요.